프롤로그 ‖ 우리 춤의 근‧현대사를 되짚으며


한국의 무용예술은 한 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 경이롭고 다채로운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왔다. 물론 우리 춤의 역사는 유구하나, 여기서는 서양식 극장과 무용이 유입되기 시작한 20세기 전환기를 기점으로 잡는다. 이후 최승희, 조택원이 이끈 신무용 시대를 지나서 1960-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전문화 과정에 돌입하게 된다. 1980년대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상을 꽃피우면서 소위 말하는 ‘무용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1990년대에 촉진된 전문화, 선진화, 국제화는 21세기로 이어져서 한국 무용예술의 양상을 더욱 다각적으로 펼쳐지게 하고 있다. 33인의 무용가를 조명하는 본문에 앞서, 프롤로그에서는 격동의 근‧현대사를 딛고 정착, 발전해온 한국 무용예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20세기 전환기부터 해방 이전까지 신무용 전성기

한반도에서 20세기 전환기는 소위 말하는 개혁시대, 즉 우리나라에 근대 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한 때다. 1876년에 문호가 개방되고 이후 1882년까지 일본, 미국 등을 비롯한 각 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이 이루어지자 서양 문물이 물밀 듯 들어오게 되었다. 서양의 여러 예술형태들도 바로 이때 유입된 것으로 알려진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한국의 근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어 1920년대에는 일제의 문화정책으로 문화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서양의 여러 예술분야가 빠르게 유입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한국민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정착이라기보다 일제의 정책에 의해 단기간 내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한국 문화와 예술의 주체성을 약화시켰으며 기형적으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무용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전통무용은 극장 공간을 제외하고는 공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우리의 전통무용에 대한 전승이나 발전은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되었던 반면, 다양한 서양의 무용은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곧 한국의 새로운 무용으로 창안되어 본격적으로 무대 위에 올려지려 하였다.

1920년대는 무용이 하나의 문화로 인식되고 근대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한 시기였다. 1926년과 1927년에 이시이 바쿠의 내한공연은 새로운 서양 무용에 대한 충격을 가져왔으며, 최승희와 조택원 등이 춤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29년 9월에 배구자가 첫 무용발표회를 가졌고 최승희, 조택원도 잇달아 개인공연을 가짐으로써 전통무용에서 근대무용으로 넘어가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서양의 현대무용을 근간으로 하여 한국적 정신과 정서를 담은 독자적인 무용을 극장무대 위에 올렸는데 바로 신무용이다. 뒤를 이어 김민자, 박외선, 조용자, 김미화, 진수방, 이채옥, 심미원, 박영인 등의 신무용가들도 등장하였다.

『우리 무용 100년』에 의하면 “근대 무용은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26년 이시이 바쿠의 경성 공연을 기점”으로 한다. 서양에서 유입된 개념으로써 전문 무대(주로 프로시니엄 무대), 전문가에 위한 공연과 전수, 자본주의 유통 체제를 기본으로 하며 여기에 창작의 요소까지 덧붙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모두 충족하는 춤이 바로 신무용인 것이다.

신무용은 서양 무용의 체제 안에 한국적 소재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새로운 한국무용의 가능성을 짚어본 것이었고 이러한 실험정신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신무용은 일본을 거쳐 도입된 서양 무용으로 민족적 미(美)의식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고 서양 취향의 외형적 아름다움에 치중한 나머지 당대의 민족현실과는 무관한 탈(脫)역사성을 지녔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았다.

같은 시기에 한성준은 전통무용에 뿌리를 두고 여러 갈래의 민속무용을 정리, 창작하여 한국무용 고유의 기맥을 무대 춤으로 승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학무 등이 전통무용에서 배놓을 수 없는 주요한 유산으로 남겨졌다. 이렇게 볼 때, 서양 무용의 충격과 더불어 전통무용에 한 획을 긋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 과도기적 양상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의 혼란스러운 정세는 계속되었다. 좌익과 우익 간의 사상싸움으로 말미암아 1950년 6월 25일에 민족분단을 겪게 되었으며 이는 곧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혼란을 야기하고 민족문화를 양극화시켰다. 1950년대의 무용계는 일제치하 동안 억압된 민족의식과 전통사상의 부각과 함께, 무분별한 외래문화의 수용, 무용인들의 의식 부족, 국가 및 사회의 무관심이 서로 충돌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혼란스러운 변혁기에 무용은 새로운 방향, 즉 현대화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과도적인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인해 많은 무용가들이 월북하거나 납북되거나 행방불명되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기존 무용계가 재편되어가는 과정에서 송범, 김백봉, 강선영, 김진걸, 최현 등의 신무용 2세대가 등장하였다.

해방 이후 1950년대 내내 무용 관련 단체와 개인 연구소가 다수 만들어졌다. 1946년 조선무용예술협회가 결성되어 조택원을 위원장으로 하여 함귀봉, 문철민, 장추화, 정지수, 박용호 등이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함귀봉이 만든 조선교육무용연구소는 일반 대학생들에게 무용에 관심을 고양시켰다. 그곳을 거쳐 간 조동화, 차범석, 김문숙, 김경옥, 최창봉 등은 이후 무용계와 공연예술계 그리고 평론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김천흥, 한영숙(한성준의 손녀), 김보남, 이매방, 강선영, 송범, 권려성, 김진걸, 이인범, 김문숙, 주리, 임성남, 조광, 파조 등 다수의 무용가들이 개인 무용연구소를 열어 제자를 양성하면서 공연을 병행하였다. 한편 박외선은 1953년부터 일본에서 배워온 현대무용을 이화여자대학교 체육학과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도약을 위한 발판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한국인의 주체성 확립을 위한 일련의 민족의식 재건 개발사업이 시도되어지면서, 서양 지향의 풍토에 대한 비판의식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침체되어 있던 문화예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1961년의 5․16혁명은 큰 전환점이 되었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확대되면서 공연예술도 서서히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60년대에는 무용계의 전문화된 발전에 바탕을 이루는 주요한 일들이 다수 일어났다. 우선, 1961년 한국무용협회가 ‘무용예술의 발전, 국제적인 문화교류, 무용가의 지위향상과 권익신장’을 목적으로 창립되었으며 무용계의 질적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업들을 속속 만들어갔다.

둘째, 1962년 국립무용단이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결단식을 가졌는데 구성원은 단장 임성남, 부단장 김백봉과 송범, 단원으로 강선영, 권려성, 김문숙, 김진걸, 이월영, 이인범, 정인방, 조용자, 주리, 진수방 등 13명이었다. 이러한 직업무용단의 탄생은 곧 무용 전문화를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셋째, 같은 1962년에 재정된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중요무형문화재가 지정, 보호, 관리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중요무형문화재란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문적 가치가 큰 것을 말한다. 이후 1969년 승무가 27호, 1988년 태평무가 92호, 1990년 살풀이춤이 97호로 지정되었다.

넷째, 독자적인 예술관 확립이라든가 기교의 체계화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전문적인 무용교육에 대한 요구도 확대되어 갔다. 1963년 우리나라 최초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무용과가 설립되면서 아카데미 체제 안에서 무용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에 여러 대학교에서 속속 무용과가 신설되어 많은 무용가들을 배출함으로써 무용계의 비약적인 발전에 일임을 다하게 된다.-대학 무용과는 1970년대 말에 11개 그리고 1990년대 말에는 전문대학을 포함하여 50여개까지 늘어났다.

다섯째, 대학 교과과정 편성의 영향으로, 한국의 무용 장르가 기법에 따라 크게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으로 3분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무용에 김백봉, 발레에 임성남, 현대무용에 송범의 주도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미국에서 현대무용을 수학한 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육완순이 급부상하게 된다.

이와 같은 1960년대의 활발한 무용계 상황은 1970년대로 이어지면서 한국 무용사에 커다란 이정표를 남기게 된다.


1970년대 전문화 과정으로의 돌입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는 공업화와 산업화가 가속화되었고 그에 따른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된다. 같은 시기에,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근대화 정책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였으며 문화적인 면에서는 한국전통에 대한 반성을 통해 확고한 전통관을 다져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용계는 한국 무용문화의 전통성을 회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기존 신무용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광범위하게 펼쳤다. 변모하는 문화예술 환경으로 말미암아 기존 신무용이 지니고 있었던 전원풍의 예술 감성은 그 매력을 급속하게 잃어갔다. 1976년 조택원의 작고와 함께 신무용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시대적 흐름에서다.-물론 그 영향의 잔재는 한 동안 이어졌다. 동시에 정부 주도하(下)의 민족문화진흥사업으로 인해 한국 전래무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부각되자 한국무용계는 이를 적극 수용하기에 이른다. 특히 민속무용이나 궁중무용 혹은 탈춤과 같은 한국 전통무용에 대한 발굴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한편 서양 무용의 방법론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응용한 한국의 발레와 현대무용도 해방 이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다가 이 시기에 공연예술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신무용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양적 표현방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발레나 현대무용은 이후 무용공연의 창작 기법을 다양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유의미한 국내외 무용 교류도 눈에 뛴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파견할 한국민속예술단이 결성되어 조택원을 중심으로 송범, 김백봉, 김문숙이 안무 지도를 맡은 바 있었다. 이를 계기로 1970년 사단법인 한국민속무용단이 정식으로 결성되었는데 구성원으로는 단장 조택원, 이사 김백봉, 임성남, 김문숙, 전황, 최현, 운영위원장 안제승, 그리고 단원으로는 박영숙, 이예신, 최혜숙, 김말애, 박연진, 정봉애, 김경희 등 20명에 달했다. 그밖에도 뉴욕에서 무용을 시작하여 포스트모던댄스 장르에서 이름을 알린 홍신자가 1973년 귀국공연으로 대대적으로 주목 받기도 하였다.

1973년에는 공적 지원기관인 한국예술문화진흥원이 설립되면서 무용계 전반의 활동은 더욱 가시화되었다. 무용창작, 무용공연, 무용강습회, 해외연수 등 대내외적인 활동이 증가하면서 무용계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는 실제적인 공연 횟수와 그를 논하는 평문의 가시적인 증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979년부터는 대한민국무용제를 개최함으로써 우리나라 창작무용의 발전에 적지 않게 기여하게 된다.-대한민국무용제는 1990년부터 서울무용제로 개칭되어 유지되고 있다.

같은 1973년, 장충동에 현 국립극장 건물이 완공되었다. 이때부터 한국무용으로 전문화된 국립무용단과 발레로 전문화된 국립발레단이 분리되어 각각 송범과 임성남을 단장으로 하여 본격적인 활약상을 펼쳐 보였다. 이에 고무되어 1973년 부산시립무용단, 1974년 서울시무용단, 1976년 광주시립발레단이 속속 창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대학 무용과에서 체계적으로 학문을 습득한 무용전공자들이 무용의 이론적인 기반을 확립하면서 그 발전 가능성을 타진한 시기이기도 한데, 특히 ‘전통의 현대화’에 대한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각 대학에서 배출된 무용가들 역시 무용계의 비약적 발전을 예견할 수 있을 만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1976년에는 조동화에 의해 월간 <춤>지가 창간되면서 본격적인 춤평론 시대를 열었다. 춤평단이 조성되었으며 무용평론가에 의한 글쓰기가 정착되어 갔다.

1970년대 무용계에서 두드러지는 창작 경향은 우선, 신무용기에 주를 이루었던 독무 위주의 공연형태에서 벗어나 (대규모) 군무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그만큼 무용예술계의 양적, 질적 저변이 확대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군무의 발달은 무대구성을 다양하게 변모시켰고 무용극 형식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음악이나 무대장치, 소품 등과 같은 여러 구성요소들을 도입시켜 독자적인 무용의 영역을 개발하는 등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 창작성을 지향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전통적인 무속이나 민속적인 요소를 내재한 움직임이나 춤사위를 수용하여 다양한 표현양식을 갖추었다.

이렇듯 1970년대는 무용예술의 질적 향상이 두드러진 가운데 무용가의 독자적인 예술관이 확립되어간 시기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려는 창작의도가 현대적인 창작의 중요한 요소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창작 경향은 훗날 국제무대에서도 소통될 만한 한국 무용예술의 독자성을 확립할 수 있게 하였다.


1980-1990년대 무용의 르네상스 시대

1970년대 무용계의 긍정적인 변화양상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활성화되었고 곧 ‘무용의 르네상스 시대’라 부를 정도로 발전되어 갔다.

한국의 무용은 양적 확산과 질적 향상을 모두 이루어냈다. 무용공연이 해마다 비약적으로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공연 공간과 연행 개념이 변모되고 확충되었다. 무용계 안에서만 자급자족하던 공연의 유통구조도 일반 관객에게 개방되어 갔는데, 이는 무용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크게 변화시키면서 무용을 공연예술의 중요한 한 장르로 자리 잡게 하였다. 직업무용단과 신진무용가들의 본격적인 등장, 지역 상호간의 교류와 국제적 교류의 확대, 무용비평의 활성화 역시 한국 무용계의 새로운 변화양상이었다.

무용 움직임과 표현에 있어서도 다양한 양상을 띠며 발전하였다. 마임적인 움직임, 연기술, 소극장 공간을 중심으로 한 실험적인 창작물, 마당춤 등이 정착되어 가는 한편, 민족과 민중의 개념을 확대하기 위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무용 장르별 발전 양상을 보면 1980년대는 현대무용과 한국창작무용 분야의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였고 1990년대에 발레계의 발전이 이어진다. 특히 1980년대 중엽 신무용의 완전한 퇴조와 함께, 한국창작무용은 양적으로 대폭 증가하여 소재의 다변화를 꾀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경기대회의 개막식과 폐막식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한국무용은 우리 무용문화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이러한 의식은 전통의 발전적 계승이라는 이슈를 대두시키기에 이른다.

대학에서 교육을 마친 전문인들이 신진세력으로 부상하여 다양한 무용경향을 이끌어간 시기이기도 하다. 1970년대 결성되어 1980년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대학 동문단체들이 서서히 창작무용 활동을 주도해 갔다. 동문단체들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되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신진무용수와 안무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1980년대에 한국의 무용문화가 활성화될 수 있었던 다각적인 원인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대학 무용과의 성공적인 정착과 확산 그리고 발전은 곧 많은 전문인들을 양성, 배출시켰다. 둘째 소극장을 중심으로 극장공간이 확대됨에 따라 신진무용가들은 더 많은 활동의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대극장이 중심이었던 1970년대에는 많은 무용수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반면, 1980년대에는 공연공간에 대한 의식이 변화하면서 소극장, 거리, 공원 등 다양한 곳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 셋째 무용이론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지함으로써 무용서적과 학회지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넷째 무용문화 및 공연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무용과 예술 관련 잡지 역시 눈에 띠게 증가하였다.

다섯째 대외적으로는 무용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무용행정의 제도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두 차례의 국가적인 행사 즉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게임을 계기로 다양한 문화행사가 펼쳐지는 한편 외국의 유수한 무용단체들이 속속 내한함으로써 무용문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더불어 국제적인 행사와 관련된 공연예술을 중심으로 정부 및 기업의 지원도 활발해졌다.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무용을 둘러싼 외적 문화 환경의 변화가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무용공연문화를 활성화시키는 기반이 되고 있다.

1980년대의 비약적인 발전상은 1990년대에도 이어진다. 무용공연 양상이 서울에서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대중화의 징후를 띠게 된다. 그리고 무용예술이 장르별로 전문화되고 시스템적으로 선진화되는 동시에 무용계의 국제교류가 보다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갔다.

구체적으로는, 각 무용단체의 활동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신진무용수들과 안무가들이 많이 배출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신진무용가들을 중심으로 보다 전문화된 형태의 무용작업이 활성화되어 갔다. 또한 전문적으로 세분화된 무용교육이 요구되는 동시에 실용적인 무용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대학 커리큘럼에서도 이를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엿보였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공연기획 활동의 중요성이 어느 시기보다 부각되었다. 페스티벌, 무용제, 제전 등의 명칭이 자주 등장하면서 무용공연기획이 보다 조직화, 심층화되어 갔다. 같은 맥락에서 소극장을 중심으로 한 공연 프로그램도 활성화되었다. 우리 무용계가 선진적인 시스템을 확립함으로써 이루어낸 일련의 실례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중엽부터 우리나라 무용가들이 국제무대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으면서 우리 무용계의 국제화 경향은 더욱 촉진되었다. 그렇다고 우리 무용계가 국제화만을 중요시한 것은 아니다. 같은 시기에 전통무용계에서는 우리 것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고유한 뿌리를 찾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980-1990년대에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무용가들을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대무용 분야에서 1980년대 창작운동을 이끈 이들로는 이정희, 박명숙, 박인숙, 이청자, 김복희, 김화숙, 김옥규, 양정수, 김기인, 김경옥, 이혜경, 노춘희, 박영희, 박재희, 황문숙, 서영희 등이 있다. 보다 독자적이고 개성있는 창작활동을 펼친 이로는 이정희, 남정호, 최청자, 이숙재, 조은미, 전미숙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가장 독자적이고 개성있는 형태는 홍신자의 포스트모던댄스에서 찾을 수 있다.-포스트모던댄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당시에는 전위무용으로도 불렸다. 1990년대 중후반에 현대무용계에 주목할 만한 변화는 한국 컨템포러리댄스의 선구자로 분류할 수 있는 안애순, 홍승엽, 안성수, 안은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한국무용계에서는 한국창작무용은 소재 다변화와 함께 양적으로 대폭 증가하게 된다. 1980년대 한국창작무용을 이끈 사두마차로는 김매자, 문일지, 배정혜, 김현자가 거론되는 가운데 조흥동, 국수호, 정재만, 채상묵. 한상근, 김숙자, 김근희, 임학선 등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지역에서는 김은이, 최은희, 백현순, 권정숙 등이 활동하였다. 1987년 이후 제2의 창작무용 세대로서 윤덕경, 김영희, 강미리 등이 언급되는가 하면 1990년대 들어서 오은희, 김선미, 김말애, 김은희, 김삼진, 박재희, 이청자, 이은주, 장유경, 정은혜, 김운미 등의 활동상도 눈에 띤다.

발레계로 가보면 김학자, 진수인, 박경숙, 정남숙, 이복선, 조미송, 김선희 등이 주로 전문적인 교육 쪽에서 일임을 다했고, 주요 직업발레단의 주역으로 활동한 최태지, 문훈숙, 김인희, 김순정 등이 무대 위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가 하면, 이상만, 민병수, 김긍수, 문병남, 정형수, 제임스 전, 이원국 같은 남자무용수도 다수 등장하였다. 발레계는 세 장르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해외 진출을 이루어냈다. 1985년 강수진의 스위스 로잔콩쿠르 입상 이후 김지영, 김용걸, 김주원 등이 세계적인 발레콩쿠르에서 입상함으로서 국위선양을 하였다. 더 나아가 강수진, 허용순, 김용걸, 강예나 등이 세계적인 발레단에서 활동한 바 있다. 이러한 발레계의 발전상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1980-1990년대는 우리 무용이 화려한 비상을 이룬 때라 할 수 있다. 1980년대는 우리나라 무용의 60년 역사에 획을 그으면서 보다 선진적인 무용의 시대로 전환되는 시기인데, 이는 세대교체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의 무용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시적인 발전 양상을 보이면서 전문화, 선진화, 국제화되어갔다.


21세기 초의 새로운 창작 양상

우리나라 무용예술은 1세기 정도의 기간 동안 격동의 근‧현대사를 딛고 일어나 찬란하게 개화하였으며 1980년대 이후 1990년대를 거쳐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세계무대와의 격차를 더욱 좁혀나가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 주도적인 무용경향인 컨템포러리댄스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과 전개를 이루어내고 있다.

1980년대에 경제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 문화 개방은 세계의 다양한 창작기법과 안무사상을 접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였다.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경기대회를 계기로 일어난 한국창작무용의 국제화 추세는 1990년대에 더욱 본격화되었다. 개방화와 세계화로 인해 세계와의 교류가 활발해졌으며 이러한 흐름은 무용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 무용계는 세계적인 무용 추세를 보다 다각적으로 확인하고 이에 동참하려 했던 것이다. 국제 행사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지원이 활성화되면서 외국의 유수한 무용단체들이 속속 내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는 세계적인 무용 추세와의 거리를 좁혀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내 무용가들 역시 해외로 진출함으로써 한국 현대무용의 역량을 재확인하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20세기 말에 서유럽을 중심으로 등장한 컨템포러리댄스는 세계 무용계에 가장 주도적인 무용경향으로 자리잡고 확산되어 갔다. 한국에서도 모던댄스와 컨템포러리댄스의 중간지점을 실험했던 여러 선구자들을 위업을 뒤로한 채, 1990년대 중엽부터 예열되기 시작한 컨템포러리댄스화(化)는 1세대를 거쳐 2000년대 들어 다음 세대 무용가들에 의해 더욱 촉진되고 확산되어 갔다. 이들은 컨템포러리댄스의 특질을 적극 활용하여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창작물을 활발하게 발표함으로써 한국 컨템포러리댄스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왔다.

우리나라 젊은 무용가들 사이에서도 컨템포러리댄스는 기성세대의 한국무용이나 발레 혹은 현대무용만큼이나 자신들의 춤을 대변해주는 용어가 되었다. 요즘 젊은 무용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춤을 컨템포러리댄스로 지칭하는 것은 매우 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선행문헌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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